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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건축을 말할 때 단청은 빠질 수 없는 상징입니다. 붉고 푸른 색채가 어우러진 처마, 연꽃과 구름이 흐르는 천장 문양은 단순한 장식을 넘어 우리 문화의 철학과 정신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우리는 오늘날 많은 건축물에서 단청이 사라지거나 훼손된 채 방치되는 현실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에서는 단청이 사라진 공간들의 실태, 그 원인인 현대화와 관리 부족,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보존의 방향에 대해 깊이 있게 짚어보겠습니다.
단청의 훼손 현장: 색이 벗겨진 문화의 흔적
도심의 오래된 향교, 지방의 작은 사찰, 심지어는 문화재로 지정된 고택이나 누각에서도 우리는 종종 색이 바랜 단청, 갈라진 문양, 혹은 콘크리트로 덧씌워진 외벽을 마주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고풍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속엔 오랜 시간 동안의 방치와 무관심이 스며 있습니다.
경기도의 한 향교를 방문했을 때였습니다. 조선 중기에 세워져 지역 유생들의 교육과 제례가 이어졌던 그곳은 한때 화려한 단청으로 장식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색이 바래져 나무결만 드러나 있었습니다. 문짝 위에 남아 있는 구름 문양 몇 조각만이 그나마 이 건물이 단청을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려줄 뿐이었습니다. 관리 인력 부족으로 단청 복원은 계획조차 어려웠고, 지역 주민들도 “그냥 원래 그런 줄 안다”고 말하더군요.
또 다른 사례는 부산의 한 사찰.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양식으로 변형되었다가, 해방 이후 복원을 시도했지만 비용 문제로 전체 단청은 포기하고 일부만 간소하게 처리된 상태였습니다. 단청이 빠진 건축물은 마치 생기를 잃은 듯했고, 그 위에 덧칠된 현대적 페인트는 오히려 이질감을 더했습니다.
이처럼 단청이 사라진 공간은 전국 곳곳에 퍼져 있으며, 그 배경에는 다양한 현실적인 문제들이 얽혀 있습니다.
현대화의 그늘: 전통을 덮은 편리함
단청이 사라진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현대화’라는 이름의 개발과 변화입니다. 산업화 이후 우리 사회는 빠른 속도로 도시화되었고, 과거의 것보다는 새롭고 효율적인 것을 선호하게 되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전통 건축과 함께 단청도 점차 뒤로 밀려났습니다.
1960~70년대 도시 확장과 재개발이 한창이던 시절, 많은 전통 건축물들은 ‘낡은 것’이라는 이유로 철거되거나 리모델링되었습니다. 단청으로 장식된 목재 기둥은 철골로 바뀌었고, 정교한 문양은 하얀 페인트로 덮였습니다. 단청은 유지관리 비용이 많이 들고, 복원도 까다롭기 때문에 실용적이지 않다는 인식이 확산된 것입니다.
또한, 학교, 공공기관, 마을회관 등 일상 속의 전통 공간들에서도 단청은 ‘비용 절감’의 이름 아래 사라졌습니다. 실제로 단청 복원에는 전통 안료와 붓, 장인의 인건비 등 많은 자원이 들어가기 때문에 현대식 외장재에 비해 몇 배의 비용이 소요됩니다. 그 결과, 단청은 고궁이나 사찰처럼 상징성이 강한 건축물에만 남고, 일상적인 전통 건물에서는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된 것입니다.
디자인적으로도 ‘단청은 옛날 것’이라는 편견이 작용합니다. 현대인에게 단청은 여전히 낯설고, 다소 과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건축 설계 단계에서부터 단청의 사용이 배제되는 경우가 많으며, 이로 인해 전통은 점점 박제된 박물관 속 유물처럼 존재하게 됩니다.
보존의 과제: 무지와 무관심을 넘어서
단청이 사라지는 이유는 단순히 비용이나 현대화만이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전통을 바라보는 우리의 인식과 태도에 문제가 있습니다. 단청의 의미를 모르면, 그것이 사라지는 것도 안타깝지 않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단청은 단순한 색이 아닙니다. 오방색을 중심으로 우주와 인간, 건축의 질서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철학의 결정체입니다. 연꽃 하나, 구름 한 줄기에도 의미가 담겨 있고, 그 모든 문양은 우리의 정체성을 반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가치를 체계적으로 배우지 않았고, 그래서 단청의 소중함도 잘 모릅니다.
이제는 단청을 단순히 ‘예쁘다’고만 소비해서는 안 됩니다. 문화재청이나 지자체는 단청이 적용된 건축물을 대상으로 주기적인 관리와 복원 계획을 세워야 하며, 일반 시민들도 단청에 대한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가져야 합니다. 초·중등 교육에서부터 단청을 비롯한 전통 건축 예술에 대해 소개하고, 체험 프로그램을 늘려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청을 살아 있는 문화로 인식하는 변화입니다. 단청이 과거의 것이 아닌 지금 우리의 삶과 이어질 수 있는 문화로 자리 잡는다면, 사라져가는 단청 앞에서 더 이상 무관심하지 않을 것입니다.
결론: 문화재로 보존되는 단청
단청은 단순한 색의 장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조상들이 우주와 삶을 바라보던 방식, 건축과 자연을 연결하던 지혜, 그리고 미에 대한 철학이 담긴 문화유산입니다. 지금 우리가 외면하고 방치하는 그 단청 하나하나가 사라질 때, 함께 사라지는 것은 곧 우리의 정신과 역사입니다.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단청이 왜 필요했는지, 왜 아름다웠는지, 왜 지켜야 하는지를 말입니다. 그리고 답해야 합니다. 복원이 어려워도 시도하겠다고, 시간이 걸려도 가르치고 배우겠다고, 그렇게 전통을 오늘의 문화로 만들겠다고.
사라진 단청을 다시 불러들이는 것은 과거를 복원하는 일이자, 미래를 설계하는 일입니다. 색을 잃은 공간을 다시 채우는 그 붓질 하나가, 바로 우리의 문화와 정체성을 이어주는 길이 될 것입니다.